종교적 경험과 궁극적 실재
Shared on April 18, 2026
감사합니다.
그리고 컴퓨터가 버벅거려 저번에는 내가 그 여섯 번에 얘기했었는데 손 안 본 것 같아요. 와서 지금 수업을 뭐 어쨌든 하고 나중에 와서 좀 바이러스 같은 거 어떻게 좀 하려고 하는데 버벅거려가지고 답답했을 때 이제는 지난 시간에 유흥문까지 했었죠. 유흥문 같은 경우에는 그 이 집단적 모의식 그리고 지금 집단적 모의식 그 영역 안에 다양한 그 원형들이 있다.
인류에게 유전적으로 이어된, 변성되어 내려오는 패턴이, 고유한 패턴들이 있다는 거죠. 그 중에서도 이제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궁극적인 원형으로서의 The Self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인생 여전 과정에서 이 에고와 The Self가 하나로 통합되어 나가는 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더셀프와 에고가 하나로 통합되었을 때 온전한 인격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거를 일종의 기본적인 언어로 얘기하면 구원의 상태라는 것이죠. 그거를 인디뮤제이션이다. 인디바이트는 나누었던 것이 하나로 다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통합된다. 이런 컨셉으로서는
그리고 더 셀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온전히 알 수 없는 것 인간이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지금 중고적인 언어로 얘기하면 더 셀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어떤 자아, 참된 자아지만 사실은 이거는 이제 어떻게 보면 무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할까?
인간이 그 부분적으로밖에 알 수 없는 그러니까 일종의 많은 부분이 신비로 남아있는 부분이죠 인간이 알 수 없는 어떤 부분들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것에 대한 하나의 일종의 이미지네이션으로서의 뭐 갓이라든가 그다음에 뭐 이 북다 석가문이 북타라든가 그러니까 인간이 인류 역사 안에서 만들어낸 가장 어떤 그
궁극적인 것, 가장 완전한 상태 이런 것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바로 이것에 대한 일종의 상징어다 이렇게 본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맥락으로 본다면 우리가 이제 종교에서 그동안 쭉 다양한 종교들에서 자신들이 호칭하는 또는 자신들이 명명한 궁극적 실제들이 있잖아요 ultimate reality에
궁극적 실제들이 있잖아요. 뮤슬런 종교에서는 '갓' 물론 각 종교마다 이름이 다르지만 '야베'라든가 '알라라든가' 그리고 그 다음에 도교 같은 경우는 '도' 그 다음에 힌두교 같은 경우는 '브라우마' 뭐 불교 같은 경우는 인격적 중재가 없기 때문에 이제 이쪽에 그 '무' 또는 '공' 궁극적으로 있는 그러니까 '얼티메트 리얼리티'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시킬 수 없는 최종적인 어떤 것 실질이 있는 것 이걸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불교 같은 경우는 무, 무, 어떻게 썼더라? 매달 약자만 떠와서 또는 이게 중국으로 넘어오면 용추사상은 공이라고 불러요. 대승전 통해서 공이라고 하거든요. 텅 비어있다. 텅 비어있지만 사실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거라는 겁니다. 신묘하게 있는 것, 신묘유, 있는 것이면서도 있는 것. 그러니까 뭐냐면 우리가 인간의 인지지평 속에서는 인식지평 속에서는 있는 것과 없는 것 나눠보잖아요.
있으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거고. 내가 여기 있으면 다른 데 없고 다른 데 있으면 여기 없고 여러분들이 여기 앉아 있으면 집에는 없고 이런 식으로 이렇게 나눠 보는 거잖아요. 있다 없다 이분법적으로. 근데 이제 이러한 경지 속에 들어가면 그게 있고 없고 라고 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그런 경지에 갈려야 하는 거죠. 그게 이제 우주의 현실이라는 거고 그거를 이제 공이라고 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그래서 뭐 예컨대 이제 이런
이미지를 갖는 종교들의 언어들, 표현들을 보면 특히 이 신비가들 이 신비가들이 이런 얘기들을 제가 많이 하는데 근데 그리스도교의 신비가인 유명한 가장 위대한 신비가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이스터 에카르트 에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없이 계시는 이게 감이 없니까? 무슨 말 하는지 이해 돼?
예를 들어 보세요. 여기 지금 공기로 가득 차 있잖아. 그쵸? 우리는 공기의 실제를 못 느낀다고. 그렇지만 있는 거라는 거지. 불교식으로 말하면 전정 또는 삼매의 상태에 들어가거나 또는 신비주 전통에서는 엑스타시 상태라고 하더라. 엑스타시 또는 타론 상태가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병험자들의 표현에 의해는 그 상태에 들어가면 내가 지금 죽어 있는 거지, 살아 있는 거지.
구분이 안 되고 내가 깨어있는 건지 잠들어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되고 그 다음에 공감감도 없어져 시간감도 없어져 전후 좌우도 없어져 버려 그런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속에서 우주의 참된 현실을 본다. 물론 유슐런 종교에서는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본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렇지만 이게 동양 종교로 넘어오게 되면 특히 불교 같은 경우는 공이나 무 라는 식으로 표현이 되고
이게 도교 같은 경우는 도라고 표현이 되죠. 도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물리적인 실제라기보다는 하나의 법칙, 하나의 질서 이런 컨셉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은 각각의 종교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Ultimate 같은 것들은 이게 왜 그리스도계는 아까 신비자상이라고 얘기했지만 신비라는 말 자체가 이게 알 수 없음이라는 뜻이거든 이게 베일에 가려져 있음 장막으로 가려져 있음 이런 뜻이에요 알 수 없음 이해됨? 이해됨? 오케이? 사실은 이렇게 따지면 칸트가 물 자체는 알 수 없다고 그랬잖아요
물 그 자체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조대로 그 물에 대해서 해석하고 인지한 내용만 있을 뿐이지 물 그 자체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얘기를 했거든. 사실은 물 그 자체는 신비입니다. 우리가 인지하려고 하는 대상 그 자체는 신비야. 우리가 왜 알 수 없기 때문인가. 내가 여러분들하고 만나서 얘기하고 여러분들은 오랫동안 자겻고 오랫동안 상호 소통을 했지만 그 대상에 대해서 내가 다 아는 게 아니거든.
단순한 물리적 사실로서의 보드 마크라고 하는 것도 이게 단순한 사실이잖아요 단순한 사실이지만 사실은 그런 논리에 따르면 이것도 우리가 다 알 수가 없는 거야 우리가 이해하는 한에서 내가 이 대상을 알고 있을 뿐이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 다른 여타의 부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거 그래서 신비라고 말할 수가 있는 거야 근데 이렇게 따지면 어떤 논쟁들이 생기냐면 그러면 그 대상 자체를 실제 그 자체를 알 수가 없는데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뭐냐? 카트의 용어로 현상이지 현상이라는 것은 뭐냐? 어떤 의미가 있느냐? 이런 것과 논쟁을 또 한다고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우리의 의식구조 속에 재구성하고 있는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또는 그 대상에 대한 알미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가? 가치가 없는 건가? 여러분 보세요. 우리가 전혀 얘기했지만 그런 것에 기초해서 우리가 법질서를 만든다고 했잖아
윤리도독이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안에서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두고 거기서 우리가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그것대로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건가? 윤리도독이라는 것이 우리가 지금 인간세계에서 만들어놓은 윤리도독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윤리도독이라고 하는 것이 각각의 민족이나 각각의 공동체마다 조금 다른데
보편적인 것이라는 게 있는가? 이런 질문을 드릴 수가 있는 것이죠
자 육어는 거기까지 하고 그 다음 윌리엄 제임스인데 윌리엄 제임스 사실은 육어하고 유사해요 사실은 윌리엄 제임스가 먼저죠 윌리엄 제임스는 그때 당시에는 유럽이 학문의 중심지였는데 윌리엄 제임스는 미국사지입니다 프레그머티즘, 실용주의 실용주의라고 그러나? 프레그머티즘 뭐라고 하지? 신용지라고 하네
유틸리티즘이 실용주의 아닌가? 그 제레미 벤담이 하는 것이 실용주의 아닌가? 아 뭐 딱히 생각이 안 나는데 어쨌든 이 사람은 그 유럽에 그 당시에 아주 영국에서 아주 그 석학들에게만 허락하는 그런 강좌가 있는데 그 강좌 이 디퍼드 강좌라고 해서 그거 있는데 이 사람은 그런 강좌 할 정도로 상당히
그 학문적 업적을 굉장히 인정받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내가 다시는 박사 과정도 이 사람을 전공했어 그리고 종교심리학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가장 고정적인 사람으로 보통 받아들입니다 근데 이게 윌리엄 제임스라고 안 나오는 거 버리지 그 윌리엄 제임스라는 사람은 어떻게 봤냐면 그 사람은 이제 용어는 조금 다른데 어떻게 보냐면
이 인간의 의식구조는 이 의식에 장이 있고 필드 이름으로 필드 개념으로 설명을 한다 필드라고 하는 건 그 당시에 유행했던 이번 주간에 장 필드 세월인데 세월인데 그 필드라고 하는 건 어떤 개념에서 그걸 쓰는 거냐면 우리가 자기 장을 생각하면 돼 자기 장이라고 하는 거는 딱히 경계가 분명히 정해져 있지 않잖아요 자기 장은 중심으로 가면 굉장히 강해지고
바깥으로 나갈수록 힘이 약해지잖아. 그렇지만 이 경계가 무엇인지를 두부짜리씩 딱히 정할 수가 없는 거거든. 그게 뭐냐면 우리가 인간이 그러니까 예컨대 융이라든가 프로그램 같은 경우는 의식과 무식 그러면 마치 두부를 자른 것처럼 분명하게 경계가 지은 것처럼 느낌을 주잖아.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의식의 연계라고 하는 것은 그게 사실은 이게 불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은 여기에 있는 의식적 자아로서 중심의식의 자는 확고하게 내가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중심의식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여기는 그 외부와 내부가 이 분간이 구분이 잘 안 되는 서로 갔다 갔다 혼동되는 이런 혼합되고 있는 그런 경계라는 거죠. 그래서 필드라는 개념을 쓰는 겁니다 이 사람. 이 사람만이 맞지 사실은. 예를 들면 내가 의식적으로 오늘날 현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나라고 했을 때도 나라고 하는 게 분명하게 이게 물리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고체처럼 고정되어 있는 이 자아가 아니거든.
이게 항상 변화되는 과정적인 거거든 이것을 누가 얘기하는 거냐면 이게 속가문지가 얘기하는 거야 나라고 하는 건 그게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끊임없이 생성소멸하는 거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거거든 이걸 소량철화 거라고 하면 화이트헤드라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한다 고정 확정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뭐든지 항상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고체로서 나무로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실제 같지만 이것도 지금 통화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변화되고 있는 거라고 멈춰 서 있는 게 없다는 거예요 끊임없이 변화 과정 속에 있는 거라고 그리고 이 의식의 장 바깥에 있는 것은 잠재의식이다 잠재의식의 장이다 이렇게 봤어요 그러니까 이게 보면 그러니까 프로이트 나 융은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하는 경계로 나누는 거랑 이런 무슨 개념이죠? 잠재우식. Subliminal.
consciousness입니다. Subliminal. consciousness. Subliminal. liminal이라는 말은 문지방이라는 뜻이거든요. 문지방. 경계라는 뜻이죠. liminal. 문지방. 그래서 문지방 아래에 있는. 그러니까 이런 의식의 경계 아래에 있는 이런 컨셉으로 얘기합니다. 잠재의식이라는 말은.
그래서 인간은 보통 평상시에는 이 의식적 자아가 그래서 이거를 뭐냐면 중심의식이라고 해요 중심의식 즉 나는 학생이야 그러면 학생으로서 정체성이 분명히 있는 사람은 학생으로서의 중심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근데 이제 졸업을 했어 졸업을 하면 직장에 들어갈 거 아닙니까 그럼 직장에 들어가서 직장인으로서의 중심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데 매출 적응을 잘 못해 그러니까 직장인 직장을 다니면서도 학생처럼 살아 생각하고 마인드 자체가
마인드셋이 아직도 학생으로서의 그 시절을 버리지 못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직장 의사가 계속 깨지는 거야. 상상은 돼. 마인드셋이. 그러니까 그 중심의식의 장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몇 번 깨지다 보면 이제 점차 직장인으로서 예를 들면 학생은 아마추어잖아. 그러니까 용서가 된다고 실수를 하잖아. 근데 직장은 프로페셔널이거든. 프로페셔널은 돈 받고 하는 거기 때문에 실수하면 뭐 한두 번 정도는 봐주겠지만 세 번, 네 번 계속 반복적으로 실수한다 그러면 책임을 줘야 되거든.
책임지는 게 뭐야 결국은 잘리는 거지. 근데 맨 처음에 그런 중심의식의 장이 변하지 않은 상태로 다니다가 계속 실수하고 계속 그러다 뭐 뭐라고 해 심화를 써 쓰고 어쩜 말다가 나중에 이제 잘릴 위기까지 가게 되면 마음은 고쳐먹는 거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그렇지 않으면 잘리겠다. 그럼 그때 비로소 이제 중심의식의 장이 변하는 겁니다.
다른 것을 변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비로소 직장인으로서의 프로페셔널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중심의식의 장이 있는데 그래서 이 사람은 이 중심의식의 장이 변하는 것 그것을 회심이라고 봤어요 conversion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에서 회심이라는 말을 많이 쓰죠 계신 곳에서부터 회개한다는 말이죠 이게 conversion 그 이전의 삶에서 완전히 다른 자아로 바뀌는 것
그 이전에는 알콜 중독에 도박에 뭐 이런 아주 그 인간 말종에 생활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나서 그 이산생활을 싹 버리고 이제 아주 건전하고 아주 윤리적이고 성실한 사람으로 변했다. 이걸 회계라고 해요. 회심. 물론 그 회심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죠.
또한 다시 범죄 절주는 사람들 있잖아요. 옛날에 조폭대장 조영은이라는 사람이 옥상수까지 했잖아요. 자기가 막 간증하고 그리스도를 만나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완전히 기존의 삶을 다 청산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간증까지 했던 사람들. 나중에 또 사실 조폭으로 불법 절주다가 또 감옥 또 갔고 이런 것 같아요. 그건 이제 거짓말이지 하시라
자기 스스로 그러니까 자기가 의식적으로 거짓말한다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진짜 내가 회개했다고 착각한 것이죠 또는 그걸 이제 스스로 이제 자기 기만하는 기만 자기 기만 자기도 무식적으로 자기를 기만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의교적으로 사기주기 위해서 기만하는 경우도 있겠죠 뭐 어젯 근데 이제 이게 이 사람을 이렇게 보면 이게 의식의 장이라고 하는 것은 기억의 장입니다 기억 기억 가지고 있고 저번에 얘기했지만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의미 질서가
의미질서가 수축되어 있다라고 하는 건 자기 나름대로 세계를 보는 그 세계관이 있고 그 세계관에 맞춰서 모든 사태나 모든 사물들에 대한 의미부여가 정리가 되어 있는 그런 상태에서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테트리트로 얘기하면 테트리스라우스 보면 이제 이런 여러 가지 도형들이 내려오잖아요
용대로 내가 차곡차곡 이렇게 넣잖아 차곡차곡 쌌잖아 테트리스 해봤지? 착착착 쌌잖아 그러니까 이건 뭐냐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이 세계관 일종의 그것도 어떻게 보면 의미질서거든 의미질서를 다 가지고 있고 다른 어떤 새로운 경험을 했을 때 또는 새로운 어떤 대상을 자기가 인지할 때 그 대상에 대해서 의미 부여를 하면 자기의 마저 있는 이 매트릭스 안에 딱 끼워 맞춰진다고 매트릭스 안에
근데 의미부여가 안 돼 도저히 이게 도저히 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이 매트릭스 안에 이것을 띄워 맞출 수가 없어 그건 못 받아들인다고 거부한다고 받아들일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근데 이렇게 이런 각 형들이 내려와야 되는데 갑자기 원형이 딱 내려와 버려 이게 새로운 경험인데 이게 이 기존에 있는 생김과는 다르게 생겼어 꼴이 어디다 집어넣을 데가 없잖아 그럼 어떻게 패닉이 오는 건지 사실. 패닉이 오는 건지.
대표적인 게 그런 거지 아주 그...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아주 어렵사리 아주 그... 난임으로 고생하던 여자가 부부가 어렵게 어렵게 진짜 진짜 최후의 수단을 이용해서 아기를 가져와서 아기가 너무 너무 기쁘고 너무 사랑하고 너무 소중하잖아 근데 그 아기가 태어난 지 한 1~2년밖에 안 살았는데 뭐 어떤 병에 걸려 물질 병에 걸려주고 뇌종양에 걸려주고 받아낼 수가 없지 뭐 보자.
받아들이지지 못하지. 그래서 어떻게 해? 못 받아들이면 어떻게 해?
너무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이게 자기 방어 기제인데 그러면 그거를 못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 삶 자체가 지옥이 되어버린다고 살 수가 없어 너무너무 고통스러워 너무너무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이 극단적인 예를 들면 일종의 핵입성 기역상식 쪽에서 간다고 이 사람 자기 나에게 가졌다는 것을 몰라 잊어버렸어 기역이 지워져 버려 이게 자기 방어 기제야 이게 자기 스스로 기억을 지는 겁니다.
의식적으로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라 무시적으로 기억이 지워지는 거예요 해리성 기억 단기 기억상실증을 악의 가졌다는 건 몰라 왜 그걸 기억하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아예 잊어버리려고 하는 거죠 아예 그것이 안 되는 사람은 아예 그냥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아예 삶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도 있고 생명이 된 의지가 없어져 버리는 그런 경우도 있고
많은 경우에는 사실 타협을 하죠. 그런 게 내려오면 어쨌든 자기 나름대로 의미부여를 해가지고 억지로 억지로 그걸 깨워 맞춘다고. 깨워 맞추면서 그냥 타협하고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의 깊이가 조금쩍 암울어 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그것들을 이제 만각해 가도 못 통은 거죠. 보통. 그렇지만 그치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게 어려운 거죠.
복사라고 그러나 복사라고 여러분들 이불킥 한다고 그러잖아 이불킥 그것도 이상한 거야 이불킥도 잊혀지지 않는 거지 하 참 몇십 년 지나네 나도 지금도 그래 지금도 그렇게 어떻게 이렇게 과거에 한 30년 전에 있었던 그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잖아 그리고 막 지금 그때 내가 왜 이랬을까 막 이런 후회를 한다고 진짜 이불킥이지 나는 이 말인지 몰랐었거든.
그래서 나중에 스스로 이해가 되더라고요. 아 이런 걸 이불킥이라고 하는구나. 맞지? 내 말하는 게 맞지? 이거지? 그럼 아직도 내가 지우지 못한 그 이불킥 기억이 한 내년 9까지가 있어. 어쨌든. 자 그리고 이 의식은 어쨌든 기억의 장소고 의미의 질서. 그래서 이거는 의식의 장은 코스모스의 장이라고 그랬어요. 저번에 얘기했지? 코스모스의 장. 질서가 있는 우주라고
얘기했잖아 근데 그 밑에 가면은 여기 있는 질서가 없어 무질서야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이 안에는 의미로 구축되어 있는 질서 있는 세계가 아니야 그러니까 이건 뭐냐면 내가 경험을 했지만 기억에 남지 않은 망각한 세계 망각한 여러 가지 경험들 여러 가지 계기들 이런 것들이 이 안에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안에는 다양한 계기들이 숨어 있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라 내가 기억만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래서 여기에는 쉽게 말하면 어떻게 보면 내가 외면하고 싶은 나의 진짜 추악한 모습이 그 안에 있을 수도 있는 거고 미처 내가 깨닫지 못한 진짜 위대한 나의 모습이 그 안에 있을 수도 있는 거야.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몰라. 근데 이게 모르는 척 완전히 그냥 땅속에 덮여 있는 거냐 그렇지 않고 이게 어떤 특정한 조건이 주어진 그 안에 있었던 이런 계기들이
의식의 장을 뚫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의식의 장을 뚫고 들어와서 기존에 있는 이 중심의식에 충격을 주는 겁니다. 충격을 줘서 이 안에 있었던 이 계기들이 들어와서 이거를 소거해 버리고 새로운 중심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 이거를 컨버전, 핵심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이거를 자동증이다. 자동증이라고 불렀는데 오토메티즘이다. 오토메티미를 얻도록
뭐냐면 이건 자기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고 저 무의식에 있던 것 중에 어떤 특정한 계기를 통해서 자기가 쭉 올라가서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는 거야. 중심의식의 장이 변하는 거야. 그래서 이거를 자기도 몰라. 왜 그렇게 일어나는지.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거기 때문에 그래서 이거를 오토메티드, 자동증이다. 그래서 이것은 핵심. 그래서 이 중심의식이 변하는 것 자체를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있을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일생 동안 여러 번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회심의 피크 정도가 굉장히 높은 회심도 있고 자잘한 회심도 있고 많이 있는 것이지. 평생 동안 회심을 여러 번 하는 것이지. 그 중에서 가장 강도가 세고 가장 궁극적인 회심이 언제 일어나냐면
종교적 경험을 할 때 일어난다. religious experience. 인간에게는 religious experience를 하는 구조가 주어져 있는데 그 종교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 사람이 다른 어떠한 회신보다도 가장 강력하고 가장 궁극적인 그런 회신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때의 종교적 경험이라고 하는 건 환원 불가능한 경험입니다. 환원 불가능한 것이고 궁극적인 경험이고 환원 불가능하면 궁극적인 경험이고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서 이게 자기 치유가 이루어져요. 자기 치유 치유인데 뭘 통해서? 자학 통합을 통해서 치유가 이루어져요. 통합을 통해서.
그러면서 치유가 이루어지고 통합이 이루어지는데 더 나아가면 더 나아가면 우리가 앞에서 이 그 심리의식이라는 컨셉으로 해서 모든 존재의 통일의식이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모든 존재의 통일의식이 이렇게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컨대 그리스도결적인 관점에서 얘기한다면 내가 하느님을 만나서 그 경험을 하게 되면 이제 하느님과 내가 다르지 않다 내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내 안에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이 하느님 안에 통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뭐야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이런 알미 생기는 거야 이런 알미 이런 지식이 생기는 거야 그 이전까지는 너와 나는 다른 존재야 너 나한테 못되게 울었어 그럼 나한테는 어떻게 못되게 울 거야 딥&테이크 이런 관계를 주지만 이 경험의 상태에서 알게 된 이 그...
알미라고 하는 것은 너와 내가 다 우리 그 이 하느님이라고 하는 이 신적 존재 안에 하나로 다 통합이 되어 있는 존재예요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존재예요 그러니까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네가 고통스러우면 나도 고통스러우고 네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이런 의식이 많아요 이걸 신중의 의식이라고 해요 존은 철학적으로는 Cosmic Consciousness라고 해요 우주의식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제 이러한
이러한 의식들, 이런 우주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러니까 특히 이런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그런 우주의식이 이제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형성되는 것이거든요. 이게 꼭 종교 안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종교 밖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요. 그러니까 종교는 종교 나름대로 자기들 나름대로의 전통에 따라서 표현하는 양식이 다를 뿐인데 그리스도교나 유실룸 동부에서는 하느님을 체험했다.
이렇게 표현이 되기도 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렇게 표현이 되기도 하고 불구 같은 경우는 내가 깨달은 대오각성, 각성, 무태원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근데 이제 이런 종교적 경험을 이 사람이 심리학적으로 분석을 하는 건데 그 종교적 경험의 구조는 뭐냐 이 잠재의식 안에 있는 Subliminal Consciousness Self 잠재의식적 자아 잠재의식적 Subliminal Consciousness Self 잠재의식적 자아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일로 들어와서 압도할 때 이거를 기존에 있는 중심의식을 완전히 바꿔 놓을 때
다른 자살한 것들이 바꾸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격이 다른 완전한 그래서 이걸 통해서 전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전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전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이 이게 그냥 도둑놈에서 강도로 변한다는 이런 컨셉이 아니고 완전히 윤리적인 탁월성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유리적인 탁월성 그러니까 아주 이타적인 사람들 이타적인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변한 사람들은 뭐라고 그러냐면 이것을 변하는 가치를 성인다웁니다. 성인다움. 이런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그 종교적 경험이 뭐냐? Subliminal Consciously Self가 내 의식의 장으로 들어와서 기존의 중심의 의식을 완전히 다른 전입격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그 경험. 그 경험을 통해서 그 사람이 컨버전이 일어났는데 그때 컨버전은
구체적인 탁월성을 지니게 되는 한 번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인다움이다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인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특히 그리스도 전통에서 성인으로 취재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번에 얘기했나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받을 때 세례명 간다고 그랬잖아요. 세례명은 누구를 세례명으로 하는 거냐면 성인들로 가톨릭 교회 전통이 성인들로
뭐랄까 시복한다고 하는데 정인들로 시성한다고 하는데 시성한 그 사람들 그러니까 이 살아생전에 보여줬던 모습이 사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얘기하는 거야 그런 사람들을 정해서 정인의 반전을 올려놓고 그 정인들은 죽어서 그 정인들의 영혼은 어디가 있어 천국에 가있다 그래서 그 천국에서는 하느님이 있는 데서는 하느님
직접 얼굴을 맞대고 사는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지복 직관이라고 해요. 직관, 직접 얼굴 대면하는 지복, 지극한 복. 그러니까 이게 성인들은 천국가 있다고 봐요.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럼 성인이 안 된 사람들은 어디가 있어? 키우고 깎겠지. 지옥이나 가톨릭에는 이제 림보라고 해서 연옥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러니까 중간 단계야. 천국과 지옥의 중간 단계.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 아주 극악한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 이 사람들은 다 연옥에 간다고 봅니다. 이런 영혼들은 연옥에 가 있다고 봐. 자기 조상들은 다 연옥에 가 있다고 봐요. 그래서 조상들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연령기도예요. 연령에 있는
영원을 위한 기도. 기도를 통해서 그 연옥에 있는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단련을 받고 연옥이라고 연자가 단련한 자거든 연옥에서 단련을 받아서 이제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이제 이 후손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누구한테 기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성인 호칭 기도라는 게 있는데 성인들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 누구누구를 위해서 하느님께 간구해달라고 부탁하는 그런가서 그건 연령이더라고요. 연령이다. 저번에 얘기했었지 한번. 그러니까 이제 그 사람들은 하느님하고 직접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까 훨씬 더 효과가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지 안 그런지 도리가 없지. 그렇게 믿는 거지. 그래서 그런 정인들은 천국에 있는데 그래서 카페로그에서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컨셉이 그겁니다. 쉽게 말하면 여기 천국이야. 여기 천국에 있고 그 다음에 여기 지상에 삶이 있어. 그 다음에 지옥. 지옥은 우리가 흔히 저 지하. 하데스 이런 원래 그리스 신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하데스 이게 딱 밑에 지하에 있는 거라고 하는 거죠. 그 다음에 이제 뭐 연옥은 어디, 여기, 여기 좀 있겠지. 아니면 여기쯤 있겠지
그럼 여기 천국에 있는 성인들의 그 영혼 그 영혼 이걸 이제 영혼인데 나를 예를 들면 나는 그 세례명이 뭐냐면 아우스티누스거든 아우스티누스네 이게 일종의 수호천사 같은 개념이야 수호천사 수호성이야 나를 수호해 주는 수호성인데 이게 뭐냐면 다툴릭에서는 그래서 이게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이 통틀어서
이게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아까 말했죠.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통합되어 있다고 유기적으로 생각한다고 했잖아. 이런 유기체적인 컨셉을 가지고 있다. 산자들의 교회와 죽은자들의 교회들이 다 하나의 교회에 결합되어 있다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이런 말을 해요.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론에 보면 그 중간에 어떤 말이 있냐면
성인들의 통공을 이루며 믿으며 이런 말이 있어. 성인들의 통공. 그때 통공은 뭐냐면 커뮤니오야. 라티나가 말이야 커뮤니오. 이게 커뮤니티의 어원이거든. 커뮤니오. 통공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끝이고 우리랑 별개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죽어서 저 하늘 나라 가 있지만 우리랑 같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서 통공하고 있고 그들이 우리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호칭을 불리면서 나를 위해서 또는 죽은 영혼을 위해서 하늘이 이렇게 일어나는 겁니다.
- 기도란.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사실은 이게 왜 그러냐면 이러한 신비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용기에 다 있어 어떻게 보면 사실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저번에 얘기했습니다만
우리가 경험이 있으면 나중에 그 경험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이 지적인 전통과 그다음에 실천적인 전통, 퍼포먼스 그다음에 사회적인 전통이 만들어진다고 했잖아. 이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이 경험이. 그런데 이것은 뭐냐면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매개를 통해서 이 경험을 표현하고 있는 거거든. 그렇지만 이것 자체를 완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하나의 유한한 매개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어떻게 보면 종교의 본질은 그 아크드슐라이마하나 로토가 얘기하는 것처럼 여기에 있는 건데 이게 사실은 다
신비 경험이라고 봐요 신비 경험 신비 의식 이걸 통해 신비 의식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예수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예수가 뭐라고 하냐면 야 나를 본 거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거 같아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어 힐리 그 다음에 뭐 그 때 힐리 본가 누가 그 예수한테 그래요 사부님 우리가 당신을 1년 넘게 쫓아다녔는데 어떻게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 한번 보여주십시오. 우리가 한 번도 그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그런 거예요. 야, 넌 무슨 1년 동안 좀 살인데 아직도 그걸 모르겠네. 나를 보는 건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어. 아버지와 나에게 분리의식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서 또 어떤 얘기를 하냐면 야, 저, 저, 저, 저, 지금 저 빌어먹고 있는 지금 거지한테 먹을 것을 준 거는 곧 나이에 준 것이다.
거짓하고 나하고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 이런 의식이 있다니까 그런데 이런 모든 심리의식 안에는 이게 다 있는 겁니다 분리독립되어 있는 게 아니야 모든 존재들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걸 천학적으로 말하면 일자 안에 모든 다자가 통합되어 있다 이렇게 얘기해야 된다 일자 안에 다자가 통합되어 있는 것 분리독립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다 분리독립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심원한 차원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저번에 얘기했잖아요. 저번에 융도 그런 얘기 한다고 그랬죠. 융도 모든 존재가 과외와 섬과 같아서 물 위로는 다 분리동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보면 하나로 다 연결되어 있다. 융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했잖아요.
손듣는 소리야? 손듣어? 농할 때 얘기했는데 안 됐나? 이게 모든 존재들은 이렇게 물 위에 바닥 위에 떠 있는 점 같은데 바닥 위에 숙면 위주만 보면 다 분리독립돼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밑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는 게 하나가 많아 여러분들하고 나아가면 우리가 사는 이런 거시적인 거시적인 일상생활 안에서는 분리독립적인 개체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주적인 차원으로 가면 이게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집권하는 데 이게 종교야 사실 이게 종교라고 그래서 제가 저번에 한번 그런 얘기 했던 적이 있었죠 펜 일보가 인간의 인식론 가운데 가장 밝다는 인식론이 뭐라고? 펜 일보가 뭐라고 그랬어요? 인간의 인식론 중에 가장 밝은 가장 진보한 인식론은 뭐라고 그랬다고? 신비주의라고 그랬다고 신비주의 신규주의가 가장 진보한 인간의 인증용이다
왜 이런 세계를 아니까 이런 세계를 집권하니까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경험을 통해서 기존에 있었던 이 자아는 소아야 소아 소갈딱지가 없는 소아야 소아인데 이게 올라감으로써 이게 완전히 바뀌면서 우주적인 자아가 되는 겁니다 우주의식을 가진 우주적인 자아 그래서 이걸 뭐라고 부르냐 와이드 셀프다 하는 거죠 와이드 셀프가 되는 겁니다 광대한 자아가 되는 겁니다 광대한 제약을 해서 이게
자기계방성을 가지면서 여파했거든 나 이래 다른 것들을 아주 포괄적으로 포섭하는 능력이 생긴다 이거를 자기계방성 그 이전에 우리가 너 나와 달라 이건 뭡니까? 자기 패션을 이게 너와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뭡니까? 너와 나는 대립되어 있다 라고 하는 의식을 가진 거든 대립적으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거든 근데 이게 대립적 그 시각이 없어져 있는 거지 너와 내가 대입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자기 예방 중에 만들어졌어요
-미들.
어떻게 보면 종교의 가장 핵심이 이거라고 볼 수가 있어요. 이렇게 얘기를 하면 기존의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전통들이 있잖아요. 지적인, 실천적인, 사회적인 전통들이. 그런데 이런 교도권, 즉 그 종교를 제도화한 종교들을 유지보전하고 강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을 절대화할 필요가 있거든요. 그것을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거기에 사람들이 다 순종할 것을 요구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이게 뭐냐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이런 전통들이 오래 지나가다 보면 이게 쉽게 말하면 변형되고 이게 가치가 전도된다고 가치가. 이걸 절대화시켜 버리니까 이게 원래 더 중요한데 그런데 이건 끊임없이 이거를 끊임없이 리마인드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쇄신해 나가야 되거든. 끊임없이 개혁해서 끊임없이 여기로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시간 지나다 보면 이걸 절대화시켜 버리게 되고 이 제도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강요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그때부터 그 종교는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했다는 것도 바꿔가지거든. 업데이트가 돼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과거에 야 과거에 우리가 선포했던 이 전통은 절대적인 거야. 이거는 절대 한자말도 우리는 고칠 수 없는 거야. 너를 무조건 믿어. 믿음이 부족한 자들은 믿어라. 끝에 나중에 그러면 사람들이 점점 더 이제
나가기 시작하고 안 나가기 시작하고 새로운 존재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은 안 들어가는데 절대 설득이 안 되니까. 그래서 이게 이 경제 발전이 먼저 이루어져 있는 나라를 시키도록 종교들의 영향력이 없어집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그렇게 됐어요. 우리나라는 저기를 가톨릭 교회 같은 한국 가톨릭 교회 같은 경우는 정기적으로 주일 미사회에 참여하는 사람이 13%밖에 안 됩니다.
그럼 나머지 77%는 아니 87%는 뭐예요. 그 중에서 한 절반은 아예 이제 나는 가톨릭 신자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냥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어렸을 때 가톨릭 집안에 태어나면 어릴 때 유아 세례를 받거든요. 아기 때 유아 세례를 받는데 그냥 세례만 받고 그냥 가톨릭 신자라는 개념이 없이 사는 거죠. 우리 애들이
그래서 성당 나가라고 강요하기도 그래. 뭐 때가 되면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말고 싶으면 말아라. 그러니까 자기들은 이제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이 전혀 없지. 등록은 돼 있는데 신자로서의 정체성이 전혀 없어. 그리고 성당에 나가보면 청년들이 없어. 일요일 일곱순이다가 청년미사 그러면 나가면 청년들은 거의 없어. 다 아저씨야.
이미 벌써 30년 전에 유럽은 다 그렇게 됐었거든. 그래서 교회 유지가 안 돼. 성당 유지가 안 돼. 돈 내는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어떻게 성당을 판다고? 임대해 준다고. 뭐든지 식당이라든가 댄스홀이라든가 음악홀 이런 걸 임대해 준다. 그런 데가 되게 많아. 유럽에 있는 성당들은 건축 이런 것들이 상당히 음향적으로 아주 치밀하게 설계해서 만든 거죠. 여러분들 클래식 음반들 가운데 성당에서 녹음한 음반들이 많아요.
이게 다 음향적 설계를 한 거 우리나라 성당들은 그런 거 없이 막 줘서 이게 막 안에서 막 찬성과 부르고 어쩜 하면 막 하울링색이 많이 되거든 특히 이제 고딕 양식들 서양의 성당 중에 고딕 양식들 있잖아 고딕 양식 뭔지 알지 고딕 대표되는 게 켈런에 있는 켈런 성대성당이 고딕 양식이거든 그건 천둥이 많다
등도 높고 나 들어갈 때 문 자체가 굉장히 높게 많다. 이게 벌써 들어가면서 이제 벌써 사람들을 기죽이는 거야. 위대한 하느님을 우러러 나는 진짜 미약한 진짜 미미한 존재밖에 안 된다 라고 하는 거를 건축 양식이 딱 사람에게 압도하면서 보여주는 거거든 스스로 거기 들어가면 스스로 겸손해진 그런 마음이 돼. 고딩 양식 손톱까지 쭉하게 만들고
그래서 이 사람이 뭐라고 그러냐면 그 사람이 이런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완전한 사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주장을 한다면 이 사람은 이런 경험이라고 하는 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이 경험 가치를 평가할 방법은 없다. 다만 뭘 보고 그 사람의 경험의 진정성을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느냐 그 사람의 삶의 열매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그가 내가 회개했다 막 얘기를 하지만 사는 건 똑같잖아. 그건 가짜다. 성인 다음에 삶을 살고 있느냐. 애껀데 마도데레사 같은 사람. 평생을 인도 빈민국에 살았잖아요. 그 신분기술. 그게 가식적으로 내가 했다. 그래서 잠깐의 내가 어떤 그런 봉사활동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그런 힘은 그렇게 평생 그런 삶을 선택해 살 수 있다고 하는 그 힘은
용기가 필요한 거거든. 그런 용기는 웬만한 힘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지적으로 지적으로 판단해서 이게 지적으로 당연한 것. 즉 자기의 지성에 의해서 납득하고 그것이 인간으로 당연한 것이다라고 하는 윤리적인 요구에 수응하는 것은 얼마 못 간다고. 얼마 못 가. 힘이 없다. 진정한 힘이 아니야. 그래서 로고스적인 에너지와 에로스적인 에너지를 구분하는 건데 그 로봇적인 에너지는
인간의 직접 이성을 통해서 판단하는 합리성에 의해 선택하는 걸 얘기하는 거거든 그거는 오래 못 가 힘이 없어 애로 속이는 거는 이게 affective한 측면이야 정동혁이 동료 그러니까 어머니들이 아이 자기 자식을 생각할 때 합리성을 가지고 사실 사랑하는 게 아니거든 정동혁이 사랑하는 거 그러니까 유흔하고 원한 게 이렇게 되는 거지
그 다음 질까인 루트 비식 폴바흐
자 디리카인 포에바안은 넘어가겠습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이 종교라고 하는 것에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추측들이 뭐냐 종교적 경험이다 라고 말할 수가 있고 그 종교적 경험에 기반해서 이 종교 문화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즉 종교 전통들이 구축되는 것이다. 종교 전통이 구축될 때는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그런 매개들을 통해서
表になりました。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종교 전통들 또는 종교들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표현으로서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들 또는 종교 전통들은 궁극적 경험에 대한 상징체리라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궁극적인 세계에 대한 통찰이고 우주와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그 안에 담고 있고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의미의 의미부여체계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의미의 해석과 공유의 체계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종교라고 하는 것들 중 하나의 해석학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주와 인간을 나아가서 신까지 포함할 수 있겠죠.
우주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해석학적 체계다. 그래 해석학적 체계가 다양하게 있는 거다.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러니까 종교 그 자체를 하나의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 상정하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거죠. 물론 그 종교에 척해 있는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게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들은 사이비야, 미시냐, 가짜야.
이렇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종교인들에게는 해당 종교인들에게는 그 종교 자체는 절제적인 거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를 볼 때는 항상 열린 태도를 가지고 다른 종교를 평가하고 이해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의 종교를 절대화하되 자기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원어부대미야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윌프렌트 템털 스미스 같은 사람은 그래서 이 종교를 기존의 서양에서 사용하던 종교라고 하는 개념을 구분해서 쓰자고 주장을 해요. 그래서 cumulative tradition과 faith라고 하는 것으로 구분해서 쓰자. 그러니까 뭐냐면 기존의 종교. 그러면 종교다 라고 하면은 이거를 가지고 종교라고 주장을 하고 이것이 절대적인 거로 강조했거든.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오게 되면 이거 다 비판 받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스미스 같은 사람은 이것과 이것을 구분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을 구분하자. 그래서 이것을 Faith, 이것을 cumulative tradition. 이건 역사적 산물. 역사적으로 문화적 매개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축적된 어떤 하나의 전통이고 전통일 뿐이지 실제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은 바로 이기고
이게 일종의 이런 여러가지 표현들로 문화적 사회적 매개들로 구축되어 있는 전통화되기 이전에 그 경험 그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어떤 마음 그러니까 아까 슐라엄마어가 얘기하는 거라든가 또는 오토가 얘기하는 것과 유사한 거죠 그런 면에서 보면 그래서 이 페이스는 초월성에 대한 인간의 삶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근원적이고 전입격적인 응답 이걸 페이스 우리가 흔히 신앙이다 라고 볼 때니까 페이스라고 이 말에서 그래서 페이스하고 belief하고는 개념이 다른 거야
그러니까 belief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런 것에 대한 믿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특히 이런 지적인 전통, 이것을 신조 라고 해요. 신조 또는 교의 또는 종교적인 안, 종교적인 지식 그것에 대한 동의를 belief라고 한다면 faith는 그거 이전에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belief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로고스적인 에너지를 사용하는 거고 belief라는 것은 뭡니까? 이게 에로스 때문에 에너지를 쓰는 거야 어펙티브한 측면이 있는 거지
즉 어떤 궁극적 실제와 나의 관계 속에서 내가 그것에 대한 응답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저 시골에서 문맥인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종교학 박사인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앙이 누가 더 신앙이 깊냐 그건 모르는 거야 그 다음에 더 깊을 수도 있어 그게 진실성이 줄 수 있는 거야 지식은 내가 많이 알고 있지만 지식과 신앙은 다르다
이걸 구분해야 된다 이 말을 한 겁니다. 그래서 cumulative tradition은 과거 종교생활이 역사 속에서 철회된 것 신앙의 삶이 창출해낸 역사적인 산물이다. 그래서 이것은 절대화하면 안 된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종교 religion이라는 말을 딱 쓰면 religion이라는 말을 쓰면 즉시 이것을 떠올리기 때문에 religion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우리가 오히려 종교를 이해하는 데 더 방해가 됩니다.
그거 쓰지 말고 우리가 페이스라는 말을 쓰자 라고 주장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프레스 켄투엘 스미스 같은 사람은 이게 이제 하버드 종교학, 하버드 학파를 대표하는 사람이거든요. 우리 앞에 얘기했던 그 멀치아 엘리아 대회는 시카고 학파를 대표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 초반대학교 전통은 이 하버드 학파에 속혀 있어요. 서울대 종교학과는 이게 대체로 멀치아 엘리아 대회 얘기에요.
왜냐하면 윌프렛 켄트럴 스미스의 제자가 서양대학교 교수입니다. 그분을 돌아가셨는데 우리나라 종교와 학교에 의해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졌던 분인데 우리 스승이지. 그분은 여기 교수를 재직하고 오실 때 이분이 왔어요. 윌프렛 켄트럴 스미스. 세계적인 석학이죠. 이분이 와서 강좌, 강연하고 그랬었는데. 뭐 예지 너 도망가셨지만
그리고 그런 종교적 표현도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이거는 이런 지적인 실천적인 사회적인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 경험에 대한 표현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여기서 제가 요아킴 바흐라는 사람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성형을 했다 이론적 실천적 사회적 표현으로서 세 개로 구성된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모든 종교가 그렇지는 않아요 사실은 왜냐면은 이게 의뢰는 있는데 이런 교의가 없는 종부들도 많거든
의례는 있는데 교의 즉 지적인 전통에 따라서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정의해 놓은 그런 종교가 없는 만큼 대표적인 게 우리나라 무속입니다 무속은 의례가 있어 불타지 않고 그게 의례죠 의례는 있는데 그게 자신들의 그 신랑이나 믿음이나 이런 거를 설명하는 논리적인 체계라 여기도 교리가 없어
그렇다고 생각하면 무속이 종교 아니냐? 아니냐. 종교 아니냐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게 되게 많아요. 무지개수록 많아요.
코로나19가 좀 헷갈리는데 자 나머지는 읽어보시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종교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들을 살펴보면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봤는데 어느 것이 다 옳은 것이다 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죠. 그래서 오늘날 종교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되도록 안 하려고 합니다. 회피하려고 합니다. 정의가 어렵기 때문에. 단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뭐냐. 한반도 꿈을 낼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인기다 종교는 어쨌든 일종의 why를 묻는 왜를 묻는 왜를 묻는다는 건 뭐겠어요 의미를 묻는 거라는 거죠 과학은 how 어떻게 설명 인과관계를 설명하려고 한 어떤 그런 체계라고 한다면 종교는 의미를 물어보는 겁니다 우리 아들이 죽었어 왜 죽어야 되지 의미를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뭐냐 하면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이 어렵게 죽었어 받아들이기 어려워
이게 왜 의미부여가 안되기 때문에 그런거죠. 그 의미부여를 해줘야 돼 누군가는. 근데 과학이 해주냐? 과학은 뭐라고 그러겠어? 얘가 가족록이 있어서 조상 가운데 이런 뇌동뇽 있는 그런 가족록이 있어가지고 유전돼서 죽었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 그게 위로가 돼. 위로가 안 되지. 짜증나지 마. 열받지. 근데 이제 이 친구나 뭐 스님이나 이렇게 왔고.
하느님이 좋은데 쓰시려고 먼저 데려가셨다고 이렇게 얘기해주면 위로가 되잖아 미신적더라도 그렇게 믿기로 한다고 자기 스스로 벗어낸다
여러분 왜 그렇잖아 뭐 요새 그런 얘기 많이 하잖아 mpti 얘기하면서 너 tg 대문자 tg 급 tg 이런 얘기 하잖아 위로가 안돼 그런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사실만 얘기하려고 그러거든 원인과관계 속에서 얘기하려고 그러거든 설명하려고 그러거든 근데 말하는 사람도 모르는 건 아니야 사실은 알지만 내 편 들어달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건데 그렇게 하면 짜증나쟁이야 나도 t성에 얘기 강하거든 나는 entpi야 entpi인데 여러분 아이디 내가 받아봤거든 여기 서는데 여기
상담 연구선가 있잖아 거기 가면 해줘 무료로 해줘 지금도 해주나 모르겠는데 그 전문가가 해주는 거거든 인터넷도 이렇게 막 간략하게 하고 이런걸 하지 말고 거기 가서 해 학생생활연구선가 뭐 있어 거기 가면 그거 해줘 그 전문가가 해준 거거든 근데 그때 ENTP가 나왔는데 내가 나이 먹고 지나가다 보니까 나는 ENTP가 아닌거 같아 INTP야
극히 모르는 사람 만나면 되게 어려워, 힘들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지금 법으로 여러분 그거 알아요? MBTI가 이게 양 MBTI가 여러분들 융이한 신념에서 나온 거 알아요? 융이한 신념에서 나온 거야 그래갖고 이게 왜냐하면 융이한이 이게 대극 개념으로도 신념을 설명하거든 음과 양으로 그런 신념을 그래서 인간의 신념을 이 두 개의 축으로 해서 4개씩 총 8개의 대립각으로 쭉 늘어놓고 이거를 교차해서 16개로 만들어내는 거거든요
그래서 맨 처음에 I하고 I는 intro version E는 intro version이야 그게 뭐냐면 자기의 삶의 에너지를 안에서 찾냐 밖에서 찾냐의 차이야 우리가 흔히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정확한 의미는 아니고 내 삶의 에너지를 안에서 찾는 사람이 있고 밖에서 사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혼자 잠시도 혼자 못 있는 사람들이 있어 너무 심심하고 막 이런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이의가 강한 사람.
근데 I가 강한 사람은 E가 강한 사람이 있으면 되게 피곤해 되게 피곤하다고 그리고 I가 강한 사람은 항상 자기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항상 그 사람은 가지고 있어야 돼 배려가 돼야 돼 그렇지 않으면 피곤해 그게 I와 E의 차이야 그 다음은 N과 S의 차이는 뭐냐면 인투이션하고 세스티브거든 -사니?
N은 인트리션의 직관이다. 이게 사물을 볼 때 직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야. 인식론 자체가 직관적인 인식론입니다. 센스티브는 이게 감각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이게 이건 흰색? 쟤는 아아 먹고 있네 뭐 이런 식으로 느끼는 사람이야. 무슨 말이야겠어요? 그래서 여기 만약에 근데 내가 여기 지금 수업하는 분이라고 딱 들어왔는데 분위기가 왜 이래? 이러면 이게 N이 강한 사람이야.
S가 강한 사람은 어? 많이 변네? 뭐 이렇게 보는 거야 그래서 이게 그래서 N하고 S 극 N과 극 S가 만나면 엄청 싸워 극 N과 극 S가 둘이 결혼하면 엄청 싸워 왜? N이 강한 사람은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못 봐 보질 못해 그 말 알겠어요? S가 강한 사람은 보이거든요 신경질을 거슬리거든요 반드시 쉬어야 돼
근데 나중에 내가 집에 들어왔는데 자기 남편이 N이야 N이 강해 근데 집이 막 엄청 기저분한 데도 그냥 기저분한 채로 그냥 그대로 놀고 있어 그러면 막 화내지 청소 안 했다고 뭐 깨끗한데 있는다고 설거지도 똑같아 남편이 설거지 시키면 설거지 했는데 나중에 S가 강한 사람 가서 보면 이게 설거지 안에 뭐가 무더위치 그대로 남아있고 막 그러면 짜증나지 이게 다른 겁니다 이게 N과 S의 차이야 tp는 알지 tp는
tp가 아니거든 뭐였지? t와 t와 t와 f지 t와 f는 아까 다 아니니까 그 다음에 ent p와 j t와 j는 t는 퍼셉션 그러니까 그 사물의 가능성을 먼저 보는 사이예요 자문의 가능성을 중요하게 보는 드라마
무슨 말이야? 제2는 있는 그들의 액면을 평가하는 게 또 중요한 사람이야 제2 무슨 말인지 그러니까 나는 피가 굉장히 강해 피가 굉장히 강해하고 좋게 말하면 굉장히 광대해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도 나고 그래 여러분 내가 채점을 할 때 내가 채점이 힘든 게 분명히 알고 있는데 잘 못 썼어 그럼 막 이건데 바빌런 신화에서 우주 창조 시는 그런 원래는 마르투기인데 마트로 이렇게 썼어
이걸 맞게 해 줘야 되나 틀리게 해 줬다라니 고민을 해 이것 때문에 시간이 많이 와요 이것 때문에 근데 제2가 더하는 사람은 딱 틀렸어 나는 책정말을 때 그래서 이게 알고 있는데 잘못 썼다 그러면 아주 그러니까 외국어 발음이니까 아주 이상하게만 쓰지 않으면 점수 맞게 해 주거든 근데 이제 이게 약간씩 틀리게 했다 그러면 반점이 세모를 준다고 이게 사람 판단할 때도 마찬가지야
나랑 판단할 때 제기가 안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한번 나한테 어떤 술을 저질렀어. 그럼 그 담부터 그 사람은 안 봅니다. 끝. 너는 내 인생에서 너는 아웃 이렇게 되는 거야. 피는 근데 안 그래. 피는 그렇게 해도 나중에 다시 또 이렇게 관계가 맺어지고 그래. 나는 아주 어떻게 보면 그 피야. 나는 과거에 나한테 엄청나게 배신 때리고 엄청나게 못되게 부르던 내가 다신 전홍하고 상종을 안 한다고 그랬는데 지금도 이렇게 이렇게 와갖고 걔가 또 와서 살랑살랑거리고 또
웃는 얼굴에 친구 뺀다고 나 뭔 얘기인 척 하고 이렇게 하고
그래서 ISTJ, 아주 증비를 들어온 유형, ISTJ 이런 얘기 하잖아. 그런데 이게 증비를 들었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 삶의 에너지와 인식론, 자기 삶의 에너지와 그 다음에 외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런 것들이 관련되어 있는 거기 때문에 다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어쨌든 간에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이게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 어떻게 보면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중국적인 차원에서 보면 죽음에 대한 의미 체계 부여 의미 부여 체계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종교라고 그래서 그거를 호모 렐리기우 수스 종교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 호모 사피엔스 이렇게 붙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는 거죠 종교라고 하는 건 하나의 인간의 속성 그러니까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종교라고 하는 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예측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종교에 대한 이해를 쭉 설명을 했지만 우리가 우리 수업에서 이 계략적인 일종의 작업정의로서 종교를 우리가 제시한다면 첫째,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 즉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어떤 근원적인 실존이 반영되어 있는 것. 실존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런 인간을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이해를 할 수가 있는
종교를 통해서 인간의 이런 우주름적인 구조를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하죠. 다른 말로 말하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누누이 얘기하지만 인간은 어쨌든 간에 식존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잖아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게 고통이 동반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고통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불행이고 불행에서 행복 고통에서 안전 안전이라고 해야 되나 고통도 맞춤 것까지 행복이겠지 한계에서 이게 뭐 솔직히 끝나는 시간만 딱 맞는 거야 근데 동교라고 하는 거는
여기 있는 상태에서 일로 가고자 하는 인간들의 지향이 반영되어 있는 거라는 종류가 됩니다 불완전성도 완전성으로 가려고 하고 그 다음에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려고 하는 그런